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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놀이 인간문화재 박용태 [한우리경제]
대전 남사당 조회수:579
2017-04-04 10:41:05

얼쑤~ 걸쭉하게 한 판 놀아 봅시다~

양반 권력자도 내 앞에선 한낱 놀림감

남사당놀이 인간문화재 박용태

 

어느 시대든 서민의 벗은 같은 계층의 애환을 달래주는 ‘예인’들, 특히 재주꾼들이었다. 

이젠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천민의 벗’ 남사당놀이패의 산증인 박용태 인간문화재의 이야기.

                              조선시대 벼슬아치와 양반들은 당시 유랑예인 집단이었던 남사당놀이패(牌)를 광대나 장인, 상

인집단보다도 못한 패거리로 매도하며 극도로 혐오하고 기피했다. 이보다 앞선 고려시대에는 더했다.

‘고려사’나 ‘문헌통고’ 등의 기록에는 아예 남사당놀이패를 ‘풍속을 해치는 패륜집단’으로 묘사하고 있

다. 심지어는 관원들을 동원해 그들의 공연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삼국시대부터 자연발생적으

로 비롯된 이 놀이패는 굴하지 않았다.
 


양반들 혐오에도 굴하지 않고 맥이어

이들은 밤 9시경부터 이튿날 새벽 3~4시까지 마을 공터나 고갯마루에서 6~7시간 동안 걸쭉하

게 한 판 놀아대고 순식간에 짐을 꾸려 다른 마을로 옮겨갔다. 40~50명으로 구성된 남사당놀이패가 노

는 신명나는 놀이는 ①풍물: 주로 충청·경기의 웃다리 가락을 바탕으로 한 농악. 때로는 각 지방의 특색 있

는 가락과 판제를 재치 있게 수용하기도 함. ②버나: 대접·쳇바퀴·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

기. 버나잡이 ‘돌리는 사람’와 받는 소리꾼 매호씨 ‘어릿광대’가 주고받는 재담과 창 ‘唱’이 일품이다. ③살

판: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에서 유래됨. 서양의 텀블링을 연상케 하는 땅재주. ④어름: ‘얼음 위

를 걷듯이 어렵다’하여 줄타기를 어름이라 한다. 버나와 같이 매호씨와의 재담이 압권이다. ⑤덧뵈기: ‘덧

(곱)본다’는 의미로 탈을 말한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뛰어난 풍자극이다. ▲마당씻이 ▲옴탈잡이 ▲

샛님잡이 ▲먹중잡이의 네 마당으로 꾸며진다. ⑥덜미 : 우리나라에 하나 밖에 전하지 않는 전통인형

극 꼭두각시놀음.(▲박첨지마당(박첨지 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과 ▲평안감사마당

(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 짓고 허는 거리)으로 나뉜다) 등 여섯 종목이었다.

남사당놀이패는 이 여섯 종목을 연희하면서 권력자를 조롱하고 가진 자는 비웃으며 이들에게 아첨하

는 하급 관원들을 난타했다. 지배층은 경악했고 관원들은 두려워했지만 서민들은 열광했다. 하층민의 억

압받는 삶을 통쾌하게 풍자했고 정치적으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대변해 꿈을 주고 자유·평등사상

을 심어 주기도 했다. 때로는 죽음의 두려움마저도 유쾌한 놀이로 승화시켰다. 놀이패의 우두머리인 꼭두

쇠의 섭외 능력에 따라 한 마을에서 며칠씩 머무르기도 했지만 일정한 보수는 없었고 떠날 때 챙겨주

는 노잣돈이 전부였다.

관원들은 남사당 놀이패가 난장을 텄다하면 비상이 걸려 이들을 잡아 들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구성원들 거의가 빈곤한 농민 출신이거나 가출아, 심지어는 유괴자들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

나 밥 한 끼 먹는 건 마찬가지여서 놀이패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의 일상은 매우 고달프

고 힘겨웠다. 조직은 일사불란하고 획일적이어서 군대 조직보다 더 엄격했다. 돈 벌이는 고사하고 50

여 명의 대식구가 하루 세 끼 먹는 식사 해결이 늘 심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예기(藝技)는 뛰어나야 했

고 신명이 나야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멸시를 참아내며 예기를 열심히 익혔다.

 

겨울철 공연 없을 때 절에서 연명

이토록 멸시와 천대 받던 우리의 전통 민속 예술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1964. 12. 7)

되고 유네스코(UNESCO·UN 교육과학문화기구)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2009.9.30)될 줄 누가 알았겠는

가? 현재 세계 각국에 진출해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류문화 악(樂)·가(歌)·무(舞)의 원조가 남사당놀이에

서 파생되었음은 학계가 공인하는 바다. 이들은 사회서 격리된 채 자기들만의 남색(男色) 사회를 이루

고 유랑생활을 하며 가는 곳마다 사찰과 연관맺고 집결지로 삼았다. 가장 유명한 곳이 청룡사(경기도 안

성시 서운면 청룡리)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남사당패의 은거지는 경기도 안성·진위, 경남 진양·남

해, 전남 구례·강진, 황해도 은율·송화 등지이다.


현재 남사당놀이의 유일한 국가지정 인간문화재는 박용태(朴龍泰·75) 보유자(2002.4.25 지정)이다. 남사

당 본거지인 경남 진양군 대곡면 단목리에서 태어난(1943.12.4) 그는 매형(남형우)과 누님(박계순)이 남사

당놀이의 초대 인간문화재여서 숙명적으로 이 길에 들어섰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 전수

회관 8층에서 그를 만났다. “집안이 가난해 여러 번 이사 다니며 헐벗고 굶주렸지만 13세부터 60년 넘

게 오직 남사당놀이가 천직인 줄 알고 살아왔다”고 했다. 안성 청룡사에 머물면서 무동 타는 법부터 배웠

고 소고치는 비법과 탈춤을 전수 받았다.


안성은 특히 남사당놀이패의 전설적 천재 예인 김암덕(金巖德·1848~1870)의 활동무대로 유명하다. 안성

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3세 때 남사당패에 맡겨졌다. 줄타기

·살판·소고 등에 능했던 그녀를 사람들은 ‘바우덕이’라 불렀다.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특별공연하고 고종

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 받았다. 남자들만의 남사당패에 15세에 꼭두쇠

가 되었지만 23세로 요절했다. 박 보유자는 바우덕이가 읊었다는 시 한 수를 암송하며 “꽃보다 더 곱

고 아름다운 그녀를 보는 이마다 탐냈고, 남사당패의 애환이 함축적으로 잘 표현된 시다”고 덧붙였다.


안성 ‘바우덕이’ 고종에 옥관자 받아

‘세모시로 만든 치마저고리를 예쁘게 차려입고

(韓山細毛施兮 製衣裳而衣之兮)

안성 청룡사로 줄타기 놀이가세

(安城之靑龍寺兮 寺黨爲業去兮)

이 내 손은 문고리인가(儂之手兮門扇之鐶兮)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네(此漢彼漢俱摻執兮)

이 내 입은 술잔인가(儂之口兮酒巡之盃兮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핥네(此漢彼漢俱親接兮)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儂之腹兮津渡之船兮)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네(此漢彼漢俱搭乘兮)’




남사당놀이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연희 부문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종목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인기 끌며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사물놀이, 난타 등의 원류이기도 하다. 

놀이의 짜임새가 매우 다양하고 연기자들의 예능 수준이 뛰어나 각국의 순회공연에서도 열광적 환호

에 휩싸인다. 독립적인 여섯 종목이 서로 연계성을 갖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종합예술 마당이

다. 민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기예 연마가 민속예술의 정수(精髓)로 승화되었다고 학계에

선 평가하고 있다.

박 보유자에게 남사당(男寺黨)에 왜 절 사(寺)자가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현재는 서울이 근거지 이지만 예전에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 각지와 외국까지 떠돌아 다녔습니

다. 겨울이 되면 공연이 없어 절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머물며 스님들이 만드는 부적과 신표를 팔아 일

부 수입을 시주하고 나머지로 연명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절 인심은 후하지 않습니까?”


남사당놀이는 1964년 여섯 종목 중 덜미(꼭두각시놀음)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후 1988년 

8월 1일 나머지 다섯 종목도 추가 지정돼 우리 전통문화의 대표 연희로 거듭났다. 현재는 진명환(70) 전

수교육조교를 비롯해 300여 명이 전수교육을 받고 있다. 이수자 박준섭(47)씨는 박 보유자의 막내아들이

다.


해외공연 땐 민간외교관 자부심


“세계 20여 개국을 순회공연하며 현지 교포들은 물론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

며 남다른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술세계는 언어가 아닌 몸짓만으로도 서로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이

럴 때마다 ‘민간외교관’이란 자부심도 가져 봅니다.”


그러면서 연습생을 교육할 때마다 “오직 한 길만을 가라”고 가르친다고 했다. 

공저로 양근수(이수자) 씨와 함께 쓴 ‘박첨지가 전하는 남사당놀이’가 있다. <시인·‘조선왕릉실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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